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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사 - 위봉산성 - 송광사

茶泉 2008. 11. 21. 15:15

 

 전북 완주군 동상 곳감

 

 

주촬산 위봉사

- 완주군 동상면 소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선교(禪敎) 31본산의 하나로 604년(백제 무왕 5) 서암(瑞巖)이 창건하였고,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보광명전현판기>에는 32개의 당우(堂宇)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현재 법당인 보광명전(普光明殿;보물608)·

시왕전(十王殿)·칠성각(七星閣)·요사채만이 현존한다.

 

보광명전 내부에는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한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좌우에 여러 구의 입불(立佛)이 있는데,

이 중에는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이 있으며 뒷벽 안에는 백의관음상이 있다.

 

그 외에 3층석탑·벽허당(碧虛堂) 등이 있으며

특히 만불화(萬佛畵)는 뛰어난 작품이다.

 

 

 

 

 

위봉산성(威鳳山城)

-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둘레 약 15km, 전북기념물 제 17 호 -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축 산성.

1675년(숙종 1)에 7년에 걸쳐

 이웃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숙종대에 이르러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으면서

전주 경기전에 모신 태조 영정와 조경묘의 시조 위패,

그리고 왕조실록을 피난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전주에서 가까운 험한 지형을 골라 유사시 봉안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 영정과 시조 위패를 이곳에 피난시킨 일이 있다.

 

1808(순조 8)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남고산성을 수축하면서

 이 산성도 수축한 바 있다.

 

당초 이 성은 너비 3m, 높이 4~5m의 성곽이 35리에 이르고

 서·동·북에 3개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축조되었었다.

 

또 동문 옆에는 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이 있다.

 

성 안에는 위봉사가 남아 있고 북방 수구처에는

위봉폭포가 있어 전주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서문

 

 

 

성안에는 초상화와 위패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으나

오래전에 헐려 없어졌다.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다.  

 

송광사 일주문 (전북유형문화재 제4호)

전북 완주군 소양면 소재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인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어 말쑥하고 단정한 멋을 느끼게 하며,

 다포계(多包系) 구조로 된 맞배지붕 형식이다.

 

또한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의 앞뒤에는 연화(蓮花)로 조각된 보조기둥이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조기둥을 포함하여 기둥은 덤벙주초(柱礎)위에 세웠고,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위에 공포를 두었는데,

창방머리 보조기둥과 주기둥을 연결하는 보의 머리,

그리고 1개의 주간포(柱間包)를 구성하고 있는 초제공(初諸工)의 끝을

 모두 용두(龍頭)로 장식하였고,

 

또한 전·후면의 3출목(三出目)과 앙설(仰舌)의 화려함은

조선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느끼게 한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새기와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처마끝 부재들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도록 함으로써

건물의 구성은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한다.

 

 

 

비천무당무(飛天巫堂舞)

 

불교가 도래하면서 민속신앙을 수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는 무속춤이 불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떤 무속무인지는 모르지만

무속의 복식을 갖추고 춤을 추는 장면은 드문 경우이다,

보관은 관모와 형식이 비슷하고

모자에 달린 장식이 신분을 봉준것으로 보인다

발에 버선을 신겨 춤 공양임을 강조한다.

의상도 지극히 단조로운 무복을 입고있어

비교적 가벼운 모습으로 처리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끝이 고기나 용의 꼬리처럼 상징화 되어있다.

 

* 이 그림과  아래의 모든 비천도는 대웅전 천정의

비천도를 모사하여 대웅전 외벽에 그려놓은 것이다 *  

(진본은 대웅전 안에 있다) 

 

* 아래의 해설문도 모두다 모사본 옆에 나란히 적힌 내용을 옮긴 것이다 * 

 

천도헌정무(天挑獻呈舞)

 

인체의 구성이나 인물 전체의 형태가 안정되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정리되어 매우 단정하다,

의상의 장식이 거의 생략되어 단순하여 오히려 웅장한 화면을 연출하고 있다.

운필은 거침없는 필치로 정리되었는데,

그 다느다란 필선이 유연하게 타고 흘러내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들어있는 세선에 빨간색과 녹색으로 크게 잡은 화면들이

강렬한 대비를 가져와 더욱 시각적인 웅재함을 보여준다.

천도는 도가에서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서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여성의 가슴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의 구성이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기도 하고

긴장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여 생기가 살아나는 모습이다.

옷자락 끝단을 굵고 강한 검정띠로 마무리하여

인물이 단순하나 강렬한 인상을 더학고 있다.

 

비천비상무(飛天飛翔舞)

 

춤을추어 여래에게 부처님께 공양하는 남성적인 여성이다.

휘날리는 천의와 뛰어오르는 몸동작이 하나가 되어 매우 힘이 넘치고

율동이 동보이고 동세의 포착이 뛰어난 작품이다.

삼각형 모양의 고깔 형태에 세 개의 날개를 꽃은 독특한 보관을 쓰고 있다.

무장한 신군처럼 강조된 보다 화려한 모자와 의상은 조선후기 불화중

"신중도"에서도 비숫한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허리에는 호리병을 차고 발에는 단순한 모양의 버선을 신었고

어깨에서 늘어뜨려진 띠가 두 번 묶여져 있어 민속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의습의 선은 날카롭고 딱딱한 선이 많고, 옷주름을 따라 음영을 넣은 것이

깊고 넓게 처리되어 면처럼 구별되어져 있다.

 

비천바라무(飛天바라舞)

 

구성이 복잡하고 의상표현과 천의의 묘사가 날카로운 각이 많아

딱딱한 형상을 하고 있다.

유연성이 한결 떨어지지만 바라 안으로 휘날리는 천의가

둥근 원을 그리며 날리는 모습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색채는 변화가 적고 대체로 붉은 빛깔의 의상을 하고 있으며

 허리끈에는 호리병이 매달려 있다.

옷자락 끝부분과 중간에 날카로운 톱날같은 돌출이 있어 특징적이다.

 의상처리가 독특하여  다른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며 묵선도

훨씬 속도감이 느려 굵고  변화 없는의습 선이 딱딱한 인상을 더 해주고 있다.

설채에서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선묘와는 달리

우리는 기법으로 정리하여

다소 매끄럽고 부드러운 인상을 내고 있다.

 

 

비천장고무(飛天杖鼓舞)

 

유연하고 여유로운 자세와 힘을 내고 있다.

얼굴이 어린 동자상을 하고 있으며

구성이 한결 단순화되었음이 눈에 띈다.

인물의 자세가 매우 극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으며

 반면에 부분 묘사는 대수롭지 않게 처리되어

한결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쌍계사의 신중도에서와 같이

장고를 들고 군관모자 비슷한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다.

화려한 의상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으며,

동자의 무복에 맞게 휘날리는 천의는 많이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단조로우며 반면에 춤추는 모습에 힘을 느끼도록 강조하고 있다.

묵선이 힘있게 찍어내린 변화에서도 색다른 묘법이며

힘과 유연성을 함께 보여주는 좋은 표현이다.  

 

 

비천타고무(飛天打鼓舞)

 

북을 길게 어깨에 메고 양손에 화려한 북채를 드는 비천상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구성이 돋보인다.

천의가 넓고 강하게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무겁고 웅장한 기분을 준다.

중국 귀부인의 것과 비숫한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보석이 엮어진 머리묶음줄이나 관신이 단순한 듯 하면서도

 화사함을 드러내고 있다.

얼굴 양 볼에 연지를 발랐으며

천의의 굵고 강한 검정색 선과 파도문양의 옷자락이

다른 의습의 가는 선과 허리띠의 가느다란 선들과

강한 대비를 보여주어 인물을 화려한 구성미가 돋보이게 한다.

옷주름을 보여주는 색채의 농담과 우림이 요철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북채를 잡고있는 오른손의 묘사가 부적절하여

부분적인 무관심으로 보인다.

 

송광사 소조삼불좌상및 복장유물 

(松廣寺塑造三佛坐像및腹藏遺物)

- 보물 제 1274 호 -

 

신라 경문왕 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  *  * 

 

송광사 목조전패

- 전북유형문화재  제170호 -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牌)이다.

전체적인 만든 방법과 형태는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다른 위패들과는 달리

왕, 왕비, 세자로 조성한 2m가 넘는 대작이다.

여러 장의 목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크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교 목공예의 시기을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송광사 동종 

- 전북 유형문화재 제 138호 -

 

조선 숙종 42년(1716)에 만든 것으로

높이 107cm, 밑너비 72cm이다,

 

 종 어깨 위 가장자리에는 작은 꽃잎무늬 장식을 줄지어 세우고

그 아래에 방패모양 꽃무늬를 두었다.

 

그 밑 종을 둘레를 따라 구슬형 돌기 50개와 위 아래를 구분하는 띠를 둘렀다.

아랫부분에는 8개의 작은 원을 조각하고 원 안에는 범(梵) 자를 새겼으며

그 아래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종의 밑자락에는 높이 6cm 정도의 덩굴문양을 둘렀다.

 범종에 새긴 글로 보아,

 이 종은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 졌으며

 영조(1724~1776)때 고친 적이 있다.

 

 

송광사 종루 

- 보물 제 1244호 -

 

조선 세조 때 세웠으나 임란 때 불타고 철종 8년(1857)에 다시 세웠다.

건물 평면이 십자 모양인데 일반적으로 십자형 건물은 흔치않으며

더욱이 종루로서는 이것이 국내에서 유일하다.

 

건물의  꾸밈 또한 평범치 않아, 특히 처마 장식이 비길 데 없이 화려하다.

종루 안에는 그 보다 140년 가량 앞서는 범종을 가운데 두고,

법고 그리고 운판 등을 매달았다.

  

 공포와 창방 서까래 등등의 어울림

보면 볼 수록 건축문화의 정수에 신명을 금치 못 한다.

 

 

아름다운 절집

종남산 송광사를 나서며... !!!

 

 전주천에 흐드러진 억새의 향연

 

 

 

 

전북 완주는 아름다운 산과 맥 들이 즐비한 동네다.

그러니만큼,

천년고찰 등을 비롯

이런 저런 문화적 요소들이  산재할 것은 당연지사.

 

목표로한 산꼭대기만 오르고 내려와서

그 산을 다 보았노라, 전부 알았노라...!

 

그렇게 말 하기엔 어딘가 좀 허전하지 않은가?

 

산에는 정상만 있는게 전부가 아니다.

그 산자락 처처에는

수수만년 흘러온 역사의 꾸러미가 어찌보면

그 산의 높이 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문화재의 향기와 역사를 동시에 아우르는 산행이어야

진정으로 산에 들었다 할 것이요,

또한 오르고 보았다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다

그 산에 자신의 비늘을 떨구고 간 인물이거나

 지금 현재 거 하고 있고 자 등을 막론하고,

 

그 산과 관련있는 자 들의 향기라도 맡게 된다면

그것은 더더욱 금상첨화.

 

 

처처에 틀어박힌 이런 저런 사연에 귀를 가져가서

그 동안 몰랐던 저간의 속사정에 대해 깨닫는 기쁨 등, 

 

그 산의 골골에 피어오르는 향기를 따라 가는 후렴에서

때로는 더 알찬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주절거려 본 얘기다.

 

 

2008. 11. 15 (토)